특별전시
특별전시
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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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간
2012/12/11~201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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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소
기획전시실
덕혜옹주 탄생 100주년, 환국 50주년 기념 특별전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옹주인 “덕혜옹주”의 유물을한 자리에 모아서 전시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 특별강연
※ 1차 : 2012년 12월 27일(목) 14:00 국립고궁박물관 별관 강당
- 김문길, 덕혜옹주의 일생
- 박윤미, 일본 소재 덕혜옹주 복식의 현황과 특징
※ 2차 : 2013년 1월 10일(목) 14:00 국립고궁박물관 별관 강당
- 박수희, 일제강점기 조선왕실 후손들의 관리 정책과 덕혜옹주
- 요코타 모토코(横田素子), 덕혜옹주의 유학과 결혼
덕혜옹주 德惠翁主 Last Princess Deokhye
덕혜옹주는고종이 환갑에 얻은 귀한 딸이자 일본의 강제병합으로 인해 기구한 삶을 살다 돌아가신 조선의 마지막 옹주입니다.
특히 이번에 소개되는 덕혜옹주의 복식과 장신구, 공예품 등 유품은 일본 도쿄에 소재한 문화학원 복식박물관文化學園 服飾博物館과
후쿠오카에 소재한 규슈국립박물관九州國立博物館의 소장품으로 국내에서는 처음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 덕혜옹주의 탄생과 유년시절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이 되던 1912년에 궁인 양씨(복녕당 양씨)에게서 얻은 딸이다. 고종은 옹주를
지극히 사랑해서 덕수궁 준명당에 유치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옹주는 대한제국 황실 자손의
수를 늘리지 않으려는 조선총독부의 정책 때문에 여섯 살이 되어서야 정식 왕공족王公族으로 등록되
고 1921년 ‘덕혜德惠’라는 호를 받았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황실의 보물이었던 덕혜옹주에 대한 관심은 더욱 지대해져 조선일보 등의 국내
언론에 자주 보도되었다. 덕혜옹주는 10세에 일본인 귀족 자제들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인 ‘일출심상소학
교日出尋常小學校’에 입학하여 일본식 의상을 입고 일본식 교육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에는 그녀의 일상이 자세하게 보도되었으며 이는 나라 잃은 백성들의 큰 위안거리가 되었다.
■ 덕혜옹주의 강제 일본행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의 황손들은 정책적으로 일본행이 추진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덕혜옹주도 일출
심상소학교 5학년 때인 1925년 일본행이 추진되었다. 덕혜옹주는 도쿄의 영친왕 저택에서 생활하
면서, 일본 황족이나 귀족 자녀의 교육을 위해 세워진 학습원學習院 여자 중등과에 입학하였다. 일본
으로 떠난 뒤 1년만인 1926년 4월 25일 아버지처럼 따르던 순종이 서거하고, 설상가상으로 1929년
어머니 양 귀인마저 돌아가셨다. 덕혜옹주는 일제가 규정한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에 따라 상복喪服
도 입지 못한 채 장례를 치러야 했다. 어머니의 장례 이후 덕혜옹주는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
고, 병세는 날로 나빠져 조발성치매早發性癡呆를 진단 받기에 이르렀다.
■ 덕혜옹주의 결혼과 생활
한일 강제병합 후 대한제국 황실을 왕공족王公族으로서 일본의 황실에 포함시킨 일본은 영친왕에 이
어 덕혜옹주도 일본인과의 혼인을 추진했다. 덕혜옹주의 배우자로는 쓰시마對馬島 도주島主의 후예
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1908~1985년)가 선택되었다. 여기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유일한 여성
미혼자로서 상당한 경제력을 보유한 덕혜옹주를 소 가문에 맺어주고자 하는 일본의 의도가 있었다.
1931년 5월 8일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으며, 결혼 이듬해 딸 마사에正惠가 태어났다. 덕혜옹주의 정신
질환은 점점 더 악화되었고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다케유키가 백작 지위를 잃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
게 되면서, 덕혜옹주를 도쿄 도립 마츠자와松沢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 조국으로 돌아온 덕혜옹주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딸 정혜는 편지를 남기고 실종되었으며 남편은 일방적으로
덕혜옹주에게 이혼을 선언하고 일본 여자와 재혼하였다. 덕혜옹주의 쓸쓸하고 안타까운 입원 생활 동
안 한반도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격변의 세월을 지나고 있었다.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이던 김을한金乙漢(1906~1992년)은 1950년 처음 덕혜옹주의 소식을 접하고 옹
주의 환국을 추진했는데, 정치적인 이유로 대한제국 황손들의 귀국을 반대했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거절
당했다. 정권이 교체된 이후, 대한민국과 일본 양측에서 모두 잊혀 가던 덕혜옹주의 존재는 김을한의 노
력으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에게 알려져 1961년 드디어 환국이 승인되었다.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26일 51세의 나이로 조국을 떠난 지 38년 만에 돌아왔다. 덕혜옹주는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의 수강재壽康齋에서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어린 시절의 유모 변복동 여사와 함께 지
냈다. 1989년 4월 21일 78세의 나이에 수강재에서 영면하였으며, 아버지 고종이 묻힌 홍릉 뒤편에 안
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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