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전시
특별전시
창덕궁 대조전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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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간
2015/04/28~201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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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소
기획전시실
창덕궁昌德宮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오랜 기간 왕실의 국정운영과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궁궐이다. 1405년(태종 5)에 세워진 이래 조선 전기에는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고 임진왜란 이후부터 고종 대 경복궁 재건 이전까지 실질적인 법궁法宮역할을 했던 창덕궁에는 그 오랜 역사에 걸맞게 내부를 장식하는 다양한 왕실 회화가 있었다.
창덕궁의 여러 전각 중 대조전・희정당・경훈각은 1917년 화재 후 1920년 재건 시 새롭게 그려서 제작한 대형 벽화로 장식하였다. 이 벽화들은 비록 일제강점기에 그려졌지만, 조선왕실 도화서 출신의 화원과 당대의 신진 화가들이 참여한 대규모 프로젝트로 탄생한 것으로, 왕실 회화의 전통을 잇고 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2년간의 보존 처리를 마친 창덕궁 대조전의 <봉황도鳳凰圖>, <백학도白鶴圖> 두 점의 벽화를 최초로 일반에 공개한다. 왕과 왕비의 침전寢殿인 대조전을 90여 년간 장식했던 이 벽화는 우아하면서도 정교한 왕실 회화의 전통을 보여주는 동시에 근대기 조선시대 회화의 변화상을 반영하고 있는 걸작이다. 또한 궁궐의 가장 깊은 곳을 장식했던 이 벽화를 보존처리하고 복원・모사하는 과정도 함께 소개하여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활용을 위한 노력을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창덕궁 대조전 벽화 大造殿壁畵
창덕궁 대조전은 대청마루의 동쪽 벽에 <봉황도鳳凰圖>, 서쪽 벽에 <백학도白鶴圖>가 그려져 있다. 원래 <봉황도>와 <천보구여도天保九如圖>로 장식할 계획이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두 폭 모두 대칭을 잘 이루는 화려한 화조화가 소재로 선택되었다.
<봉황도>는 서화미술회 제1회 동기생으로 제작 당시 31세였던 오일영吳一英(1890~1960년)과 17세였던 이용우李用雨(1904~1952년)가 합작으로 그렸다. 10마리의 봉황과 함께 바위, 폭포, 모란, 오동나무 등이 화려하게 그려진 이 그림은 순종 황제 부부의 침전이었던 대조전의 성격상 부부 사이의 금슬 또는 성군의 치세를 표현하기 위해 봉황을 주제로 택한 것으로 보인다.
서쪽 벽의 <백학도>는 당시 29세의 나이였던 김은호金殷鎬(1892~1979년)가 맡아 그렸다. 여기에는 16마리의 백학과 소나무, 달, 구름, 돌, 물, 영지 등이 함께 그려져 있어 십장생十長生을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도 탐스럽고 화사하게 표현되어 왕실 여성의 생활공간에 잘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대조전의 두 벽화는 모두 청록산수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화려한 채색과 섬세한 필치를 특징으로 하는 왕실 장식그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이전에는 같이 그려지지 않던 소재들이 함께 그려지거나 새로운 소재가 더해져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하고 있다.
희정당 벽화 熙政堂壁畵
희정당은 왕의 집무실인 편전便殿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순종의 접견실接見室로 사용되었다. 이곳의 동・서벽은 김규진金圭鎭(1868~1933년)이 그린 금강산 그림 두 점으로 장식되었다. 창덕궁 벽화 제작에 참여했던 화가 중 유일하게 두 점을 제작한 김규진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이미 53세의 원로였다. 김규진은 희정당의 벽화를 그리기 전인 1919년에 신문에 금강산 그림을 연재하는 등 금강산의 밑그림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희정당 벽화를 맡게 되자 바로 금강산 사경을 재차 다녀오는 등 두 점의 왕실 벽화를 제작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경훈각 벽화 景薰閣壁畵
경훈각은 본래 2층 단독 전각으로서, 대비 등 왕실 여성의 생활공간으로 활용되었으나 1920년 재건 당시는 단층 전각으로 대조전에서 뒤편 행각으로 이어지도록 재설계되었으며 이후 왕비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곳의 동쪽 벽은 당시 22세의 노수현盧壽鉉(1899~1978년)이 그린 것으로 공자가 천도복숭아를 들고 있는 내용인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로 장식되었다. 중국의 고사인물도인 이 그림은 집, 나무, 산, 바위, 인물 등의 묘사가 모두 전형적인 공필 화원 화풍으로 흰색과 검은 태점이 청록색의 암석을 강조하며, 대담하고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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