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전시
특별전시
현판으로 보는 대한제국 황궁 경운궁 慶運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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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간
2017/04/24~201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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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소
1층 기획전시실Ⅱ
현판으로 보는 대한제국 황궁의 역사
1897년 2월, 1년여 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던 고종이 경운궁慶運宮(지금의 덕수궁德壽宮)으로 돌아왔다. 고종은 환궁을 준비하며 1896년부터 경운궁 조영을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잠시 거처했고,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했던 곳이지만 200년이 넘도록 조선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적 없었던 조용한 정릉동 행궁이 제국의 황궁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해 10월 고종은 경운궁 태극전太極殿(즉조당卽阼堂)에서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 설립을 선언하였고, 경운궁은 근대도시로 변화해가는 한성의 중심이자 근대화된 제국의 황궁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어나갔다.
그러나 1904년 4월의 대화재로 공들여 건설했던 황궁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1904~1905년에 걸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19 0 5 년 중명전重明殿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상실하면서 대한제국의 운명과 함께 경운궁의 운명도 기울었다. 화재 이후 대대적인 중건을 통해 다시 궁궐의 모습을 만들어나갔으나,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뒤이어 황제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경운궁은 황궁의 기능을 상실하고 퇴위당한 고종의 거처인 덕수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들어 축소되기 시작한 덕수궁은 1919년 고종의 서거로 주인을 잃게 되자 빠르게 해체되었다. 1910~20년대에는 중명전 구역과 왕실 제향 영역인 선원전璿源殿일곽이 먼저 일반에 매각되어 덕수궁 궁역에서 제외되었고, 태평로 개설과 확장으로 덕수궁 동쪽 영역도 크게 축소되었다. 또한 1932년부터 덕수궁을 도심공원으로 만들려는 계획에 따라 중화전中和殿과 함녕전咸寧殿등 주요 전각만 남기고 많은 건물들이 옮겨지거나 헐려나갔다. 광복 후에도 태평로 확장으로 대한문과 궁궐 담이 이동하는 등 서울 도심에 위치한 덕수궁은 변형을 피할 수 없었다.
경운궁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 속에서도 대한제국을 근대화된 자주독립국가로 세우려 했던 각고의 노력과 그 아쉬운 실패의 현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운궁 내에 세워졌다 옮겨지고 사라진, 크고 작은 문과 건물의 이름을 새겨 걸었던 현판들이 남아있다. 이 현판들로부터 근대기 나라의 운명을 함께 겪었던 경운궁의 역사를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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